2023. 8. 15. 20:55ㆍ세계사
16세기 유럽사람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황금의 나라(엘도라도)가 있다고 믿었다. 그 당시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인 아메리카가 발견되었고, 그중 스페인 사람들은 그곳에 황금의 나라가 있을 것이라 믿고 탐험에 나선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에 태양신을 섬기고 자신들을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는 잉카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원래 피사로는 잉카를 한번에 찾은 것이 아니었다. 에스파냐(스페인) 사람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지금의 파나마 지역에 상주하며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였는데 그때 여러 원주민들에게 남쪽으로 가면 황금의 제국이 있다고 듣고 잉카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처음 탐험을 실패하고 두 번째 탐험에서 오랜 항해 끝에 툼베스 항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피사로 일행은 원주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입항한다. 처음 잉카인들을 본 후 피사로는 페루 남부 해안까지 다시 탐사하러 떠났다. 그리고 툼베스로 다시 돌아와 세명의 소년을 데리고 갔는데 이는 스페인어를 가르쳐 통역을 하기 위함이었다.
잉카 제국이 있기 전 여러 문명
안데스 지역에는 기원전 60년에서 기원후 500년 사이에 존재했던 나스카 문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지상화'로 유명하다. 지상화란 땅에 기하학적 도형과 동물을 거대한 형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그 뜻을 이해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잉카제국이 있기 전 문명은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차빈문명, 모치카족의 문명, 등이 있었다. 잉카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먼저 통일을 이룬 왕국이 있었는데 찬찬이라는 도시를 세운 치무 왕국이다. 치무왕국은 페루의 북쪽에 흩어져 살고 있던 부족들을 먼저 통일한 왕국이다. 다른 유명한 문명으로는 북쪽의 차빈 문명과 남쪽의 파라카스 문명등이 있다.
잉카제국의 번성
원래 여러 종족을 통치하려면 갖춰야 할 기본요소들이 있다. 첫번째는 권력의 강력한 집중, 두 번째는 정복지역을 다스릴 체계 세 번째는 여러 종족이 함께 써야 할 언어이다. 잉카의 경우는 그들의 수도인 쿠스코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쿠스코에 살던 지배 계급이 첫 번째였고(물론 잉카왕 -사파잉카라고 칭함), 둘째로 정복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오레혼이라는 귀촉 계층을 만들어 잉카의 대리자 역할을 맡겼다. 언어는 케추아어로 통일했다. 이로 인해 잉카는 점점 통일된 제국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파차쿠텍의 통치시절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처음 잉카제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통합이란 쉽게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다. 특히 찬찬 도시를 기반으로 한 치무인들은 잉카에 끝까지 대항했다. 피사로가 툼베스에서 만난 원주민들 또한 잉카의 지배 방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왕국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앞서 잉카에 대해 설명했듯이 이들은 사민정책을 펼쳤는데,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지역 사람들끼리 단결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쿠스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영토까지 지배하기에 효과적이었다. 비어있는 곳에는 우호적인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감시하고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각 민족의 족장들은 인질 정책으로 쿠스코로 가거나 쿠스코의 영향이 미치는 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피사로의 일행이 항해하던 잉카 제국의 말기에 점차적으로 심해졌다. 반란의 진압 시에는 그 지역 사람들이 공포에 떨도록 잔인하게 했다고 하는데 반란군은 모조리 학살하는 등 잔혹함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실제 문서로 남겨진 것이 없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속 잉카제국은 와전된 경우가 있다. 특히 잉카와 스페인의 혼혈인인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라는 작가가 잉카 군주들을 지혜롭고 관용이 넘치는 위대한 왕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잉카의 잔인한 풍습
우리는 남미의 잔인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 인육을 먹는다는 아즈텍 민족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잉카도 그에 못지 않은 잔인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소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과 처녀를 태양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잉카제국은 매년 어린아이들을 제사 의식에 바쳤다. 각 지방에서 선발된 아이들을 쿠스코로 보내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했는데 실제 제단에 아이들을 바치기 전 좋은 옷을 입히고 고기 등을 먹이는 등 마지막 대우를 좋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곧 동굴에 가두거나 산골짜기에 버려 홀로 고통스럽게 죽게 하였고, 돌로 때려죽이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잉카인들이 어린이들을 바침으로써 고통과 질병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를 잃은 가족들은 엄청난 부와 명성을 누리게 되었는데, 오늘날 볼 때 강제로든 자의로든 결국 어린아이인 자식을 팔아넘기는 반 인륜적인 일을 한 것이다. 심지어 부와 명예를 누리기 위해 종종 마을에서 먼저 아이를 바치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잉카에는 '아크야'라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 여인들은 태양신의 처녀로 불렸다. 각 종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뽑아 잉카에 바쳐졌는데 이 소녀들은 어릴때부터 평생 갇혀 살았다.(하렘과는 다름) 여인들은 잉카의 허락 없이 결혼을 할 수 없었으, 평생을 잉카의 옷을 만들며 보내야 했다. 가끔 아크야에게 반해 집을 침범하는 사내들의 경우 사형에 쳐해 졌으며 아크야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순결을 잃을 시에는 여인을 산채로 매장했다. 또한 남자와 가족들 그들의 친척들, 기르던 동물까지 모두 죽이고, 집까지 불태웠다고 한다.
잉카제국의 몰락
원래 피사로 일행이 항구 툼베스에 도착했을 때는 우아이나 카팍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툼베스의 귀족 오레혼이 왕에게 수많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쳐들어 올 수도 있다고 전갈을 보냈다.
그런데 이 시기 이미 남미 지역에 천연두가 퍼지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면서 가지고 온 질병으로 이 병에 면역력이 전여 없던 잉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실제로 우아이나 카팍또한 1526년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이때 잉카제국에 중요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왕위 계승자였던 우아스카르에게 이복형제인 아타우알파가 도전하여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계속된 것이다.
1532년이 되자 스페인으로 돌아갔던 피사로가 왕의 후원을 받아 잉카 정복에 나선다.(새로운 대륙의 풍부한 자원과 엄청난 보물들이 아마도 피사로를 끈질기게 남미에 집착하게 만든 이유가 아닐까?) 다시 툼베스 항구에 도착한 피사로 일행은 생동감 넘치던 마을이 아닌 전쟁과 질병으로 엉망이 된 마을을 보았다. 이야기를 들은 피사로는 우아스카르와 대립 중인 아타우알파가 있는 카하마르카로 향했다. 그 당시 잉카제국의 도로는 해안과 산맥을 어디든 통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덕분에 피사로가 잉카를 정복하기 더 수월했다.
이 당시 아타우알파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왕위를 차지했다. 전쟁시 얼마나 잔인했는지 적군의 가죽을 벗겨 북으로 만들고 두개골에 금을 입혀 술잔으로 사용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이것은 적군 및 반란군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행한 것으로 보인다.
카하마르카에 도착한 피사로 일행은 아타우알파의 잉카인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말과 총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자 다른 수를 쓰기로 한다.
카하마르카의 광장에서 아타우알파와 피사로 일행이 만나기로 약속이 되자 피사로는 부하들을 숨겨 습격을 준비했다. 이때 아타우알파가 이끄는 행렬이 장관이었는데 우아스카르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우알파는 흥분해 있었다. 호화롭게 장식한 가마에 올라타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옷을 입은 근위병에 둘러싸여 등장했다. 또한 이때 아우이알파는 한껏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잉카인들은 이들의 운명이 뒤바뀌는 시간 앞에 서 있었다.
광장에 아타우알파가 도착하자 피사로는 신부를 보내 성경책을 보여준다. 이걸 본 아타우알파는 성경책을 바닥에 던져버렸고 이를 빌미삼아 피사로는 공격을 시작했다. 숨어있던 군사들은 총격을 시작했고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타우알파는 살기 위해 목숨값으로 방하나를 채울 만큼의 보물을 주겠다고 피사로에게 약속한다. 이에 전국에서 귀금속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풀어주지 않고 계속해서 몸값을 요구한다. 후에 아타우알파를 계속해서 살려두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아타우알파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급하게 법정을 열고 여러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부여해 화형에 처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미이라를 만들었던 잉카인들에게는 육체가 없어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아타우알파는 화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죽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스페인에서는 아타우알파에게 자신들의 종교인 가톨릭교로 개종하면 교수형으로 바꿔 주겠다고 하고, 아타우알파는 카톨릭교로 개종했지만 화형당한다.
훗날 피사로의 사촌인 페드로가 아타우알파가 죽은 이유를 전혀 다르게 설명했는데 실제로 펠리피요라는 사람의 음모 때문이었다고 한다. 펠리피요는 처음 피사로 일행이 통역을 위해 데려간 아이 중 한 명이었는데 다른 민족사람이었다. 그는 우아이나카팍 시절에 자신의 마을이 점령당해 잉카를 싫어하고 있었다. 또한 통역일을 하던 중에 아타우알파의 아내 중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피사로와 침략자들에게 민감한 내용들을 아타우알파가 불리하게 바꿔 말해 처형하도록 조종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타우알파의 죽음으로 실질적 잉카제국은 멸망하였다. 쿠스코로 몰려간 스페인사람들은 태양의 사원인 코리칸차를 마구 약탈했다.
잉카 제국의 탄생
# 13. 안데스 문명 - 잉카 제국의 탄생
마추픽추는 세계에서 가장 장려한 고고학 유적 중 하나이지만 결코 잃어버린 도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지역 농민이 존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탐험가 젠 사부아는 1964년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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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또시 - 스페인의 광산 개발
1545년 잉카를 멸망시키고 꼭두각시 왕을 앉혀 잉카를 식민지화 시킨 스페인사람들은 한 원주민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볼리비아의 뽀또시의 산에 광맥이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즉시 광산 개발에 착수했고, 이 광산에서는 어마무시한 은이 나왔다.
스페인 사람들은 16세기 후반 무렵 이곳에서 생산된 은을 유럽으로 모두 가져간다. 계속된 채굴로 뽀또시는 구멍이 뻥뻥 뚫리고 터널이 생기는 등 흉측하게 모습이 변했다. 한편 뽀또시로 모험가와 자본가 등이 몰려들었고, 본국의 범죄자까지 몰려들어 도시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며 혹독하게 은을 채굴했다. 이들은 잠시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심지어 좁아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어린아이들이 들어가게 했다. 이 때문에 원주민들 사이에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어난 아이의 다리를 일부러 못쓰게 만드는 슬픈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개발로 스페인은 200년 동안이나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은과 광물의 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값싼 원주민의 노동력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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