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대 문명이 아닌 문명의 요람

2023. 7. 27. 15:01세계사

4대 문명이란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 중?

 
우리는 역사책에서 4대 문명의 발상지에 대해 배운다. 메소포타미아문명, 나일강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4대 문명의 이름은 보통 우리나라 및 동아시아에서 쓰인다. 세계에서는 4대 문명이라는 말 대신 "문명의 요람"이라고 지칭한다. 한 가지 명확한 점은 고대 문명은 모두 강 유역에서 시작 했다는 것이다.
 

농경과 목축의 시작- 최초로 빵을 만들어 먹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2.농경과 목축이 문명의 시작

"문명의 탄생은 농경과 목축이 8할" 우리는 국사책 및 역사책에서 수도 없이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라는 것에 대해 듣고 공부했다. 앞서 서술한 인류의 탄생과 진화 편에서 우리는 인류의 조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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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강물의 범람이다. 강이 범람하면 주변 땅은 더 비옥해 진다. 즉, 물이 흘러서 유기물(영양분이 있는 상태)이 생기고 침전된 진흙인 충적토(沖積土)가 생기면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범람하던 큰 강 유역의 사람들은 땅에 씨를 뿌리고 우기가 되기 전 수확을 하였으며, 이를 반복하여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범람농경"이라고 한다.
 
범람농경의 가장 큰 이익을 본 문명은 이집트였다. 당시 다른 강에 비해 이집트의 나일강은 매년 비슷한 시기에 정해진 수위로 강의 범람이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다른 큰 강과는 다르게 대홍수가 나서 논과 밭, 가축 등에 피해를 주거나 가뭄 등의 기근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일강은 오히려 적당하게 범람하고 상류의 비옥한 토양을 하류로 실어날랐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관개 농사를 시작하고, 농사짓는 시기 또한 예측할 수 있었다. 
 
둘째는 강은 교통을 편리하게 한다는 점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많아진 자원은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당시의 여건상 목재와 석재를 이용하여 육로로 물자를 운반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배는 강을 따라 이동이 편리하고, 강을 건널 수 도 있었다. 또한 먼 곳 까지도 이동이 더욱 쉬웠다. 따라서 강 주변이 발전하게 되는 것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일강 유역의 위성사진

 

강 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문명이 발생한 농경지대의 주변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걸친 건조지대이다. 이곳에는 물은 부족하지만 말, 소, 양(산양) 등의 가축을 기르며 유목 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농경민들과 물자를 교환하고 서로 문화를 주고 받았다. 또한 이동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먼 곳까지 문화를 전달할 수 도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


이렇듯 고대인에게 생명줄이나 다름 없는 큰 강은 각 문명이 발달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지만, 반대로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툼도 생겨나게 한다. 특히 동서 남북이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이집트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지역(지금의 이란과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유역은, 주변에 큰 산맥이나 바다가 없고 탁 트인 평원 지대였기 때문에 유목민의 침임이 많았다.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여러 고대 왕국이 자주 바뀐 이유이다.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초기 도시국가는 기원전 4000년경 수메르인에 의해 세워졌다. 수메르의 어원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 ,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인 수메르에서 살던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수메르인들은 도시국가를 설립하고 각 도시마다 성벽을 만들었다. 또한 각 도시의 중앙에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만들어 수호하는 신을 섬겼다. 이들은 수메르어를 사용하였으며 점토판에 갈대(식물)로 새겨 문자를 썼다. 이것이 유명한 쐐기문자(설형문자)로 현재 이집트어와 함께 인류 역사상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언어에 속한다. 
 
잦은 전쟁으로 수많은 영웅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영웅에 대한 많은 서사시를 남긴다. 그 중 하나인 수메르의 도시국가 중 우르크를 통치했던 길가메시라는 왕의 서사시(길가메시 서사시) 가 유명하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당시 구전되어 내려오다, 그 중 몇 편의 시는 설형문자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이것을 고대 그리스 시기의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와 오딧세이) 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수메르의 영웅이자 초인이었던 왕 길가메시가 신의 명령에 의해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성경책에 나오는 대홍수가 서사시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지질 조사에서 '홍수층'인 지층이 확인되며 그 지역에 재해가 일어났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홍수설은 후에 인도(마누이야기), 멕시코(나타와 네타부부), 베트남, 중국 등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 신화 중 하나인 홍수설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고 발전한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메소포타미아에 형성된 나라들의 순서를 보면 크게 다음과 같다.
 
수메르인에 의한 도시국가 - 아카드 왕국(각 소도시를 통일한 최초의 국가) - 고 바빌로니아 왕국(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통일) - 아시리아 - 신 바빌로니아(칼데아 왕국)

기원전 12세기 이후, 지중해 동쪽지대에 침입해 온 사람들로 인해 아시리아, 칼데아, 페르시아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는다.
 
아카드 왕국은 도시국가였던 수메르를 통일한 최초의 제국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350년경 부터 약 200년간 짧은 역사를 가진다. 그 이유는 피지배 민족들을 차별하고 주변국가와 많은 전쟁을 일으켜 반란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이란의 고원에서 침입해 온 구티족에 의해 멸망하였고 다시 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바빌로니아왕국
바빌로니아 왕국은 고바빌로니아와 신바빌로니아로 구분된다.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으로 구성된 제국이었다. 이때 수메르의 부흥기가 일어나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도시 중 '이신'(Isin)이라는 곳이 가장 강력하였으나, 19세기 초 이주해 온 유목민 아모리인(러시아어 아무르주가 어원)이 도시 '바빌론'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루게 된다. 바빌로니아 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한 약 300년간을 고대 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이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함무라비 법전이 등장하게 된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제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 왕은 분열되어 있던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고 효과적으로 여러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법전을 제정한다. 이는 거대한 석판에도 쐐기 문자로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수메르어로 쓰여 있으며 종교에 관한 규율,형법, 민법, 상법 등 여러 분야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 바빌로니아는 훈련이 잘 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중해까지 지배한다. 이후 철기 문화를 가진 히타이트에 의해 고 바빌로니아는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지역은 카사이트 왕조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지배되다 후에 신 바빌로니아가 등장한다.
 
신 바빌로니아는 구 바빌로니아를 세운 아모리인이 아닌 칼데아인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 도시 칼데아는 함무라비시절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고 바빌로니아가 멸망하고 지배 중이던 아시리아 제국의 폭정에 대항해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세워진 나라로, 칼데아 왕조라고도 불린다. 그 후 그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신 바빌로니아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때 세워진 건축물 중에 바빌론의 문, 세계 7대 불가사의인 공중정원, 바벨탑 등이 유명하다. 
 
바빌론의 문은 아랍어로 이슈타르의 문이라고 불리며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를 위해 세워졌다. 성문에는각 신을 상징하는 용, 황소, 사자가 새겨져 있고 사자는 이슈타르 여신을 상징한다. 성문의 벽돌들을 푸른 유약을 덮어 구워 고대에 귀하고 비쌌던 보석인 청금석처럼 보이게 했고, 성문에 조각된 동물과 신들은 각 다른 색상의 벽돌을 사용해 만들었다. 현재 원래 건축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20세기 초 발굴되어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복원하였다.

이슈타르의 문 사자 모양

 
당시 금성(행성)을 상징했던 이슈타르 여신은 '길가메의 서시시'에도 등장한다. 임무를 마치고 우루크(길가메시가 지배하던 수메르의 도시국가)로 돌아오던 왕 길가메시에게 첫눈에 반한 이슈타르가 그에게 청혼하자,  길가메시는 청혼을 거절한다. 그녀의 애인인 남자들의 최후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에 이슈타르가 그에게 복수를 하게 만드는데 그 과정이 이슈타르의 문에 남아있다.

바빌로니아의 멸망

 

바빌로니아 제국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으로 망하게 된다. 그는 다른 민족의 성전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억업하여 바빌로니아를 점차 무너지게 하였다. 그 후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 왕에 의해 정복된다. 신 바빌로니아는 정복당하기 전, 팔레스타인의 유다 왕국과 시리아 왕국 등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2세가 해방시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 훗날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 대왕에게 정복되었다.